입시 내몰린 청춘, 낙화암에서 떨어진다고 다 꽃은 아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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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부란 대부분 입시 공부나 취직 공부를 의미하게끔 되어 버렸다. 교육에 대한 논의란 곧 입시 제도에 대한 논의를 의미하게끔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정작 성숙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어 버렸다. 학령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각급 학교의 사막화가 한창 진행 중인 오늘날, 공부란 무엇인지 새삼 질문을 제기하고 답해볼 때가 되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김영민 교수가 연재하는 공부 에세이가 그러한 논의에 기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육열 유난히 강하다는 한국
‘무엇을 어떻게’는 묻지 않는
사실은 교육에 냉담한 나라
학교·사회 나당연합이 공부 강요

대학은 취직 준비기관으로 변질
입시와 취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탁월함을 목표로 공부할 때
잘 양념된 삶 이루고 즐기게 될 것

한국사회는 어떤 곳일까? 세계 11위권의 경제 규모만으로는 이곳의 삶을 핍진하게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평균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긴 축에 속한다. 그런데 사회 공정성 조사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사회적 분배구조가 공정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종교인이나 사기꾼을 제외하고는, 자기 일상이 지향하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요컨대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고도의 경쟁 상태 속에서 각자 버틸 수 있는 이상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 넣고 있는데, 그 일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묻기를 꺼릴 뿐 아니라, 그 경쟁 과정이 공정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곳의 삶은 급행열차와도 같다. 다들 전전긍긍한 마음으로 어느 역에서도 서지 않아도 좋으니,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좋으니,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기만을 원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게임의 규칙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기에, 누군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상대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고 시기하며, 먼저 도착한 이의 휴식을 방해하고, 뒷담화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이 불공정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경쟁에서 패하면 자칫 이 사회의 노비로 전락할 수 있으므로. 물론 경쟁의 종착지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모른다. 
  
  
생각의 힘 못 기르면 사이비 지식인 판쳐  
  
덴마크 화가 에이나르 닐센의 ‘책 읽는 시각장애 여성’. 책이 너무 흔해지고 공부의 뜻이 종종 오해되고 있는 오늘날 ‘진지한 공부’는 오히려 점자책 읽기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덴마크 화가 에이나르 닐센의 ‘책 읽는 시각장애 여성’. 책이 너무 흔해지고 공부의 뜻이 종종 오해되고 있는 오늘날 ‘진지한 공부’는 오히려 점자책 읽기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경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패거리를 만들고, 위계적인 갑질 관계를 일상화하고, 자칫 자신도 이 경쟁 속에서 죽임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타인을 짓밟기를 서슴지 않는다.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공적 가치를 믿지도 않고 내면화해본 적도 없기에, 논리보다는 기분에 좌우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비와 강짜와 아첨에 의존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신념하에 고성을 지르다가 가끔 보게 되는 타인의 전락만이 그 와중에 지쳐버린 자신의 마음을 달랜다. 바위와 함께 굴러떨어지는 동료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산비탈의 시지푸스처럼. 
  
이탈리아의 예술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태양은 뜨겁고 세상에는 쓰레기뿐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다들 고만고만하기는 하지만 속 깊이 엉망진창인 삶 속에서 자신을 소진하다가 맞게 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삶에 존엄이 깃드는 미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출산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슬기롭고 여유 있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기성세대는,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젊은것들이 이기적이어서 애를 낳지 않아서 나라가 망해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모두 자기만의 에덴동산에 있는 것처럼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언젠가는 결국 만개할 노화. 시민의 덕성과 복지가 부실한 사회에서 노인들은 도취할 자아가 사라진 자아 도취자처럼 흐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청소년기에 사실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은 일찍부터 입시에 정열을 바친다는 점에서 교육열이 강한 나라이지만, 진정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육에 냉담한 나라이기도 하다. 마치 부동산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그 부동산에서 어떻게 삶의 희노애락을 쌓아 올릴지에 대해서는 냉담한 것처럼. 사람들이 입시와 부동산에 초미의 관심사를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계층이동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학에 성공한다고 해서 갑자기 대단한 선물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사회적 대가는 혹독하다. 삶의 노역이 대물림되는 상태, 즉 노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 교육과 부동산 투자는 계층 간의 이동을 촉진하기보다는 계층을 고착화한다.
  
  
진학 실패 때 치러야 할 대가 너무 혹독  
  
지난 11일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학원에서 수험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뉴스1]

지난 11일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학원에서 수험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뉴스1]

이 과정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경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그 자녀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백제 의자왕 같은 향락을 잠시나마 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와 사회라는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온다. 이제 이 땅의 많은 의자왕들과 젊은 국민들은 입시나 취직 준비를 위해, 유년과 청춘의 벼랑에서 낙하한다. 그러나 낙화암에서 떨어진다고 모두가 꽃은 아니며, 학교에 다닌다고 다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입시생으로 혹은 취업준비생으로 이제 학생들은,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노력보다는 삶을 그저 살아내기 위한 노력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 자체가 삶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된다. 즉 삶을 현재와 동떨어져 전개되는 무엇으로 보게끔 길들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탄 급행열차의 종착지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중·고교가 입시기관으로 변화되었다면, 대학은 취업준비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대학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 대신에 졸업생 취업률과 자교 출신 엘리트 통계를 앞세운다. 대학이 취업과 무관할 필요는 없지만, 전적으로 취업 준비기관이 될 필요 역시 없다. 그러나 취업난에 몰린 학생들은 높은 학점을 원할 수밖에 없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듯, 대학 생활은 학점 인플레로 포장되어 있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스펙이요, 남지 않는 것은 실력이다. 방학이 되면 유복한 집 자녀들은 해외에 인턴을 하러 가지만, 가난한 집 학생들은 동네 레스토랑에서 단무지를 썬다. 부모의 경제력 순으로 학점이 나온다고 믿게 된 이들은 부모의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지고, 성실한 시민이 되기도 싫어지고. 마침내 목전의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처럼 젊은 날 입시와 취업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공부를 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그 화려한 시간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마치 날씨가 너무 좋은 날 경치가 아름다운 길을 돌아보지 않고 바삐 지나치는 것이 그 시간에 대한 모욕인 것처럼. 나중에 돌이켜 본 자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기껏 수능 시험을 얼마나 잘 보았나, 혹은 얼마나 명문대학에 입학했는가, 정도라면 그것은 그보다 흥미로운 지적 체험이 없었다는 자기 고백일 뿐이다.  중년에 이르러 용케 경제적 여유를 얻은 이들은, 대학의 최고위 과정에 등록해 보지만, 그곳은 엄격한 지적 탐구보다는 사회적 네트워킹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대학이 피지 못한 탁월함의 묘지 돼선 안 돼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을 때 충만한 것은 거품 같은 공허뿐이다. 생각할 수 있는 근력이 없기에,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 줄 강력한 타자를 갈구한다. 그리하여 “진리”를 설파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나 독재자가 번성하게 된다. 장기적인 것, 공적인 것, 엄정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말초적인 욕망의 충족과 단기적인 이익의 추구와 근거 없는 인정욕구가 남발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은 별빛을 바라볼 줄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스스로가 별이 될 수는 없지만, 시선을 시궁창의 아래가 아니라 위에다 둘 수는 있다. 이 사회를 무의미한 진창으로부터 건져 낼 청사진이 부재한 시기에, 어떤 공부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지옥을 순식간에 천국으로 바꾸어 주지는 않겠지만, 탁월함이라는 별빛을 바라볼 수 있게는 해 줄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더 나은 것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고, 나아가 보다 나은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할 것이다. 그러한 믿음 속에서야 비로소 비방과 조소를 넘어서는 논리와 수사학의 힘을 빌어 공적 영역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읽고 쓰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가능한 인간의 변화에 대해서 믿게 될 것이다. 입시와 취업으로 전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탁월함을 목표로 공부를 하게 될 때, 아마 한국인은 양념치킨보다 더 멋진 것, 이를테면 잘 양념된 삶을 이루고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이나 시민사회가 피어나지 못한 탁월함의 묘지가 되어서는 안된다. 대학의 사막화가 한창 진행 중인 오늘날, 무성한 대학입시 논의만큼이나 이제 대학에 가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성숙한 시민으로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이번 공부 에세이 연재가 그러한 논의에 실낱 같은 기여라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중앙일보 기사인게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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